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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리뷰

[독서리뷰]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집단주의문화, 수직적 가치관>

불평등, 빈곤, 폭력 등 인간 사회를 불행하게 하는 보편적인 문제 말고, 유독 우리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앞서 얘기한 집단주의 문화,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한 수직적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 삶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남들 눈에 띄는 외관적 지표로 일렬 줄 세우기를 하는 수직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논리상 한 명도 있을 수 없다. 그 모든 경쟁에서 모두 전국 일등을 하기전까지는 히딩크 감독 말처럼 늘 '아직 배가 고플'테니 말이다. 모두가 상대적 박탈감과 초조함, 낙오에 대한 공포 속에 사는 사회다.

28-29p.


한국사회는 이런 사회다. 실제 하는 일, 봉급도 중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번듯한지' '어떤급인지'가 실체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인 거다. (...) 자본주의사회인데 단순히 돈, 실리에 대한 추구를 넘어 지위재 집착이 심한 사회다. 수직선상 어느 위치에 있느냐, 아니 어느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에 목을 매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30-31p.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 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이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반면 합리적인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동성동본 금혼으로 고통받는 연인들을 노래하고, 간통죄 폐지, 학생체벌 금지를 주장한 그의 행보는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로서의 면모다.

37p.



'갑질'의 심리 역시 수직적 가치관의 사회에서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있으면 그걸 이용해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수컷동물 사이의 우세경쟁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 이렇게 자주 튀어나오는 사회가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타인에 대한 관용 부족으로 이어져 약자혐오와 위악적인 공격성을 낳는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는 문화, 집단 내에서의 평가에 개인의 자존감이 좌우되는 문화 아래서 성형 중독, 사교육 중독, 학력 위조, 분수에 안 맞는 호화 결혼식 등의 강박적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사실 이건 모두 같은 현상이다.

'남부럽지 않게'살고 싶다는 집착 떄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중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32-33p.


실증적 연구 결과,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우너천은 바로 인간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쾌감을 느끼는, 뼛속까지 사회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 돈은 어느 정도의 문화적 생활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그룹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사회성이 높은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에게도 생존과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핵심과제다. 오랜 진화 과정에서 인간에게 생존과 번식에 가장 피루적인 자원은 동료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활동, 즉 동료 및 이성과 어울리는 활동을 할 때 뇌에서 쾌감이라는 보상을 주어 이를 촉진시키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다. 

51p.


과학이 알려준 행복은 결국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핵심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수직적 가치관과 경쟁 역시 출세, 권력, 돈, 학벌, 지위재의 과시를 통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본성의 발현일 것이다. 문제는 본말이 전도되어 매개체인 돈, 지위 등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돈을 벌든 높은 자리에 오르든 박사가 되든 그걸 같이 기뻐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해 있을 때 뇌의 행복중추에 불이 번쩍번쩍 들어오는 것이지 모두가 슬슬 피하고 흉을 보는데 혼자 방에 돈다발 쌓아놓거나 임명장 걸어놓고 쳐다본다고 행복감이 넘쳐날 리 없다.

53p.


원래 행복의 원천이어야 할 인간관계가 집단주의사회에서는 그 관계의 속성 때문에 오히려 불행의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공감되는 얘기다. 맛있는 음식도 내가 원치 않을 떄 강제로 먹으면 배탈이 나듯, 타인과의 관계가 나의 선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되고, 의무와 복종의 위계로 짜이는데 이것이 행복의 원천이 될리 없다. 갑을관계, 경쟁관계, 상명하복관계, 나를 평가하고 지배하는 관계, 내가 일방적으로 순종하고 모셔야 하는 관계에 있는 인간들이 과연 나에게 유일한 생존의 도구이기는 할까? 생존의 위협에 가깝지 않을까?

행복에 관한 과학의 연구 결과 중 가장 씁쓸한 진실은,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소는 유전적인 외향성, 사회성이라는 점이다. 타고나길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 중독증 환자들이야말로 행복해지기 쉬운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것이다. (...) 내성적인 이들도 외향적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행복을 느끼는 체질인 것이다. (...) 집단의 강요 없이,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취향이 맞는 작은 인간관계들의 고리 속에서 말이다.

56-57p.


뒤늦게 발견한 세상은 온통 불의와 부조리 덩어리였다. 그동안 그리 넉넉하지 못한 서민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던 내게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은 큰 부끄러움을 주었다. 정말 수많은 이들이 내가 살아온 세상 바깥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공장 프레스 기계에 잘려나간 동료의 손을 들고 타이탄 트럭 짐칸에 앉아 병원에 갔지만 붙이지 못한 채 결국 공장 담벼락 아래 묻는 내용의 시 '손무덤'을 읽으며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98-99p.


대학 서열에 따라 인간의 능력, 태도 자체에 우열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선택한다.

115p.


인건비라는 숫자로만 존재하는 사람들과 그 돈 벌어서 자식 키우며 살아가는 이웃의 얼굴로 떠올리게 되는 사람들은 다르다. 후자를 떠올릴 수 있을 때 '해고 회피 노력', '성실 협의 의무' 등의 말은 비로소 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121p.


그러나 세상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 척 하느냐'는 한마디다. 요즘 인터넷에는 '선비질'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 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133p.


실제로 의미있는 변화를 도출하는 것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과격한 목소리들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반대 의견을 가진 집단의 반발과 결속만 강하게 만들어 의견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한 진영 내부에 생기는 작은 균열에서 변화의 지점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같은 진영 내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작고 부드러운 '다른' 목소리들이다. 작은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선거와 같은 큰 세력 다툼의 시기를 전후하여 집단 내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코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 슬쩍 다른 길로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창하고 근본적인 해결책만 고집하지 않고 당장 개선가능한 작은 방법들을 바로 적용했고, 작지만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켰다. 영웅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162-163p.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기업가라도 법을 초월할 수 없다. 이리저리 빠져나갈 수는 있어도 말이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제정되는 법은 사실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이런 법을 제정하고 바꾸는 작용, 즉 정치는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마지막 보루다. 함부로 냉소와 무관심에 빠지는 것은 말 그대로 마지막 남은 자신의 무기를 버리는 자살행위에 다름없다.

기업을 악마로 취급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늘 기업가들에게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 문제는 기업가 개인이 합리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이윤 창출과 효율성이라는 기업의 논리가 더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과 자본주의는 사회를 미래로 끌고 가는 엔진이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브레이크가 없으면 자기 자신도 원치 않는 파멸로 달려갈 수 있다. 개별 기업 간의 무한경쟁만으로는 결국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로 치달을 수 있으니 시장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라도 합리적으로 타협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191p.


상상하는 김에 아예 더 미래로 가보면, 복지 서비스, 정서적 서비스, 문화 서비스 분야에서 타인의 행복을 창출할 경우 뇌과학적인 방법으로 자동 측정하여 그것이 새로운 화폐가 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행복 자체가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남을 한 번 활짝 웃게 한 선행으로 획득한 행복 화폐로 아이스크림 한 통을 구매한다. 

193p.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려는 경향은 심지어 과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신념의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선천적인 양성 간의 차이 일체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성차별이라며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러니까 당연한 거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더더욱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우선 정확히 우리 존재와 그 작동 원리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남성의 성욕이 본능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성범죄도 이해해줘야 한다는 결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니까 더더욱 그로 인한 위험성을 통제하기 위한 정교하고 강력한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인간의 지능, 성격에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말은 기계적 평등만으로 부족하고 실질적 평등을 위한 적극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실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반대로 실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것은 무조건 옳다고 보는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실은 그 반대가 맞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식재료도 자연상태 그대로는 독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먹는 것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 인위적인 종자 개량을 통해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인류는 자연ㄴ 상태의 폭력성을 문명화 과정을 통해 극복하여 현대적인 평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은 지금의 발전한 문명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에 따라 옳은 것은 더욱 복돋우고 그릇된 것은 제어해야 한다.

199-200p.


재판을 해보아도 다투는 양측 모두가 진실의 일부분씩을 자신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조각 그림을 맞춰야 비로소 진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한쪽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승리란 존재하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상대를 몰살시키는 전쟁이 아닌 이상 중간에서 타협하는게 현실적이다. 당파적 진영 논리는 이런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생략하려는 게으름이다.

203p.


흑인들은 게으르고 자포자기한 듯 살아가며 순간적인 쾌락만을 좇는다는 것이다. 거의 맨주먹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해 이제는 나름대로 아쉬운 것 없이 사는 한국인의 눈으로는 흑인 빈민들의 삶이 쉽게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 이야기를 듣다보니 미국 인구분포로 볼 때 서민층이 훨씬 많은데도 공화당이 집권하는 이유의 일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공화당에 투표하는 유권자들의 다수는 미국 중부, 남부의 백인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자신들은 주말이면 교회에 가고,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면서 근면하게 일하며 살아왔다. 정부가 자신들을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부가 자꾸 세금을 많이 걷어서 게으름뱅이, 마약쟁이, 범죄자, 불법이민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한다. 게다가 미치광이나 강도라도 나타나면 내 사랑하는 가족을 지킬 것은 내 총밖에 없는데, 이것을 빼앗아가려고 한단다.

이들을 어떤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까? 너희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자유롭게 살던 흑인들을 억지로 잡아와서 목화농장에서 강제노동을 시켰으니, 너희는 자손만대로 저들에게 죗값을 치를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설득해야 하나? 인간은 도덕적 설교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현재 이들이 느끼는 부당함에 대한 그럴듯한 답을 주어야 설득이 가능하다. (...)

미국 정부는 이 빈민가 사람들을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하는 것 없이 문제만 일으키는 골칫거리로 보고 있겠군요. (...) "이 사람들이 없었으면 미국이 이렇게 잘살게 되었을 것 같나? 흑인들이 농장에서, 공사판에서, 공장에서 일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거야. 미국이 최강국으로 성장한 데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고. 지금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걸 잊으면 안 돼."

225-226p.


어느 시대에나 타자의 고통에 대해 가장 예민한 이들, 가장 '호들갑스럽게'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길거리에서 타살당할 염려 없이 일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241p.


높은 세 부담을 북유럽 사람들이 감수하는 것은 내가 낸 세금이 효율적으로 쓰여서 반드시 내게 혜택이 돌아온다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렴하고 유능한 정부와 공무원들이 오랫동안의 실적으로 그런 신뢰를 얻어낸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면 도덕적인 것만으로 부족하고 유능해야 한다.

256p.

또한 평생직장 보장은커녕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정책을 폈다. 대신 실업자에 대한 높은 실업급여와 질 좋은 직업훈련을 국가가 책임짐으로써 노동자의 현재 일자리는 보장하지 못하지만,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다른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실업 문제를 해결했다.

257p.



북유럽 국가들도 자본주의 체제다. 재벌이 있고 빈부격차가 있다. 하지만 자기과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성숙한 배려의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에 빈부격차가 실제보다 더 적게 느껴진다. 

26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