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와 어린양>
1
천국 문 앞에 모인 의인들의 외침
"저것봐라. 그분이 다른사람도 용서하시려고 한다."
"나는 모든 고난을 겪었단말야. 믿을 수가 없군."
"우리는 어중이 떠중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은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는 하나님을 거절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다. 오로지 인류를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에만 의존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으로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적게 드물게 엉성하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다른 일들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참고 기다릴 시간이 없다.
3
안주자 신앙을 가진 나는 스스로 법의 노예가 되어 그로 인해 내 특권을 강화하고 안전감을 얻었다. 그리고 내가 짊어진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지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낌없이 자유를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기뻐하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안주자 영성의 쌍둥이인 율법주의와 도덕주의가 기독교의 공동체적 차원을 갉아먹어 버렸다.
결점투성이 사람이라도 그들은 선하며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존재자체러 사랑스럽다.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는 훗날 전통적인 교회가 세운 그 어떤 족쇄도 없었다. 그들은 사랑의 어법으로 말하고 과감한 욕구에만 전념하는 자유의 학교이다.
4
분노의 감정이나 원한, 적개심, 쓰라림 등의 감정은 자기권리에 집착하며 남에게 존경받으려는 욕망에 매여 있어 자신이 참으로 가난한 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음에서 비롯한다. 내가 예수님의 충고에 따라 맨 끝자리에 가서 앉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나를 그 자리에 앉힐 때에도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불안과 자기 비하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은근히 내 업적을 자랑한다. 성령의 권능에 대해 온갖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폭넓은 지식과 깊은 기도생활로 남을 감동시키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모두 남의 관심을 자기에게 돌리려는 짓이며,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훔쳐내는 것이다.
복음서의 큰 역설 가운데 하나는 포기가 곧 승리라는 것이다. 포기가 힘든 것은 결국 믿음의 부족과 두려움, 불안, 자신과 남의 삶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마음, 우리가 매달리는 보잘것 없는 계획들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제게 보여준 거부와 비난과 등돌림에 감사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속박에서 저를 풀어 주셨으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5
현대의 회개는 우리를 예수 안으로 데려가기보다는 예수를 우리 삶안으로 데려온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신것이 세상을 뒤엎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세상 걱정, 세상 지혜, 사람의 칭송을 듣고 싶어하는 모든 바람, 영적인 위안을 포함한 모든 안락에 대한 욕심을 벗어버리라는 살아계신 명령이었다.
예수의 생애는, 최후의 승리 이전은 대부분 실패와 슬픔과 배척과 고독으로 얼룩진 삶이었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조차 회개시키지 못하셨다. 한창 나이에 꺾여 버렸으며, 사역은 막 뿌리를 내리자마자 무너져 버렸다. 친구들은 흩어지고 명예는 산산조각이 나 이름은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는 함부로 다루어졌고 이리저리 떠밀렸으며 죽임을 당해 악당들과 함께 묻혔다.
예수께서는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하신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단지 고난을,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삼으셨을 뿐이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벗들, 합류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단 한번도 그들이 순결하고 정직하고 분별있는지 혹은 존경할 만한지 물으신 적이 없다. 그분은 단 한번도 분명하게 행복을 약속함으로써 누군가가 당신을 섬길 마음을 갖게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단호하고 정직하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다.
"값있게 쓰여질 그 일을 위해 여기 이 고통을 바치나이다. 이것을 취하여 쓰소서. 가난한 사람, 집없는 사람, 외로운 사람, 직업과 아내를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을 위해, 어린 딸을 살해당한 친구를 위해 쓰소서. 제가 깨닫도록, 제가 덜 자기 중심적이고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돕는 일에 쓰소서."
6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내적인 자아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며 정신과 마음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삼아, 진정으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잠재적으로 그 분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적 행동은 실제 행동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일상생활 속의 의미없고 깊이 없으며, 신앙적이지 못한 사건들 속을 생각없이 떠다녀서는 안된다. 우리의 의지와 지성과 상상력을 동원한 창조적인 행위로써 그리스도와의 소극적인 연합을 적극적인 연합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인격적 삶과 가치관과 습관과 태도의 혁명적 변화를 가리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의 행동은 그분의 행동이 된다. 인간의 의지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변덕과 게으름을 뛰어넘을 힘을 주시는 성령께 대한 근원적인 의존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너희 삶 속에 참 하나님을 맞아들이면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나 큰 자유를 누릴 것이다. 너희 삶의 일상적인 그 어떤 근심도 네 이마를 주름지게 하거나 네 어깨를 짓누르지 않을 것이다. 모욕을 용서하고, 꾸어달라면 꾸어주고, 다른 뺨을 내밀며, 매력적인 사람을 탐욕의 마음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것이다. 너는 길거리의 주정뱅이 옆을 서둘러 지나쳐 버리지 않을 것이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과 저녁식사하기를 겁내지 않을 것이다."
7
우리는 이웃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군중은 자신들에게 일치하지 않은 행위를 관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마도 중심에서 비껴나 살지 못하게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동료의 질책일 것이다. 웃음거리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솔직한 반대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옭아맨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견해는 대개 우리가 정말 존경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단순히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손에 잡히는 결과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데도 불구하고 곧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쉽사리 냉소적이 되고 환멸을 느끼며 꿈을 버리게 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이란 대부분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나는 대부분의 날들에 그분의 부재를 느끼지만, 그분의 임재와 따스함을 고대하며 산다.
8
울법주의는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울법주의자들은 교회의 법을 지킴으로써 거짓안전감을 만들어 낸다. 율법에 매달리는 것이 삶의 궁극적 목적인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 분의 복음 안에서 사는 일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외적인 율법의 준수로 무언가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된다. 율법주의는 간접적인 신앙이다.
거침없는 신뢰란, 예수님과 그 아버지께서 상상이 필요치 않은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심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는 것이다.
9
우리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긍휼이 아닌 경쟁이 삶의 중요한 동기임을 알게된다.
남과 다르다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은 너무도 큰 위로와 기쁨이었다.
예수님의 무자비한 온유하심은 우리의 거짓 얼굴과 사소한 것들에 대한 기만과 성가신 허영심, 터무니없는 가식들을 포기하고, 너절한 인간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죄인들 모임 속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거기서는 우리의 정체성과 영광이 직책이나 소유, 명예로운 지위, 허상 속의 차이점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 안의 형제자매들과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결합된 새로운 자아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목이 메일 때, 우리는 예수님과 가장 닮은 상태가 된다. 우리가 가장 보잘것 없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임재하신다.
사랑은 동사이다. 외로운 과부를 생각하며 눈물짓는 것은 단순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 문을 두드리며, 전화를 걸어 주는 것이 자비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11
예수께서는 당신의 측근들이 경배나 사랑, 애정 혹은 칭송 같은 것으로 믿음을 대신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으셨다.
30퍼센트의 사람은 교회 관련 활동(묵상, 기도)을 통해 개인적인 안전과 확신을 갖는다.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복음의 요구 앞에서는 움츠러든다.
60퍼센트의 사람은 진정한 타인 중심의 사람이다. 그들은 제도교회가 말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들은 기독교가 의미충만하고 시대 참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라 굳게 믿는다.
60퍼센트의 사람에게 결여된 한가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열정적 믿음이다. 그는 자기 안에서 불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의 신비 앞에 아직 무릎꿇지 않았다. 그는 몸을 데우기 좋을 정도로 불 가까이에 있지만, 결코 불 속으로 뛰어 들지 않는다. 온전히 타 버린 뒤에 눈부시게 변화된 모습으로 불에서 나오는 일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훌륭하고 더 나은 도덕성을 지녔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아니다. 그의 신앙은 선하고 고상하나 충분치 않다.
실재를 회피하고 예수님에 관한 결정을 미룰 것이다. 사실 미루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결정이기도 하다.
13
일부 사람들에게 율법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지위와 교만한 자기 만족을 얻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율법은 남들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그들을 죄인과 배교자로 구분하고 배척하는 수단이 되었다. 율법이 치유와 공동체 건설의 역할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집단적 증오심을 키우는 도구 노릇을 했다.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언제나 구속의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억압이든 법률이든 관습이든 매춘이든 종교적인 속박이든 편협함이든 착각이든 자기 의든 아니면 인간을 희생자로 전락시키는 다른 어떤 예속의 힘이든, 사람들이 노예 상태를 벗어나도록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된 땅으로 출애굽하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오랜시간 교회의 테두리 안에 살면서 교회가 만든 여러가지 법을 비교적 충실히 지켜왔다. 내가 교회를 다닌 대부분의 시간은 앞장서서 일하거나 앞장서서 참여한 시간들이었고,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묵상과 기도생활에 열심이었으며, 선행과 사회참여 부분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시간동안 나 정도면 상당히 균형잡힌, 꽤 괜찮은 크리스쳔이라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한 내 열심은, 종종 타인의 신앙을 판단하고 나를 높이는데 잘못 사용되어져왔다. 나는 내 묵상과 기도생활 중에 있었던 체험과 은혜를 늘어놓으며 남을 감동시키려고도 했고, 성경공부를 통해 얻은 성경에 대한 지식들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우월감과 특권의식의 재료로 사용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들도 나와 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저들도 나와 같은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이, (체면상 표현할 순 없었지만) 몹시 불쾌하고 억울했다. 내가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열심을 낸 만큼, 저들도 저들이 누리는 것을 포기하기를 바랐다. 저들도 포기하면서 나처럼 고통스럽기를, 매여있기를 바랐다.
책은 내게 이러한 율법주의를 버리고 자유할 것을 말한다. 내가 정말 열심히 해야 할 것은 매일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경공부에 참여하며,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닌,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내가 다른이들을 사랑하기를 바라시고,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 기도, 묵상, 성경공부, 예배 등의 행위를 요구하셨는데, 나는 반대로 행위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곤 했다.)
사실, 율법주의를 넘어선 자유함은 내게 아직은 좀 어렵다. 책을 통해 율법주의가 가져오는 폐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했지만, 율법주의를 대체해야 할 자유는 무책임 또는 사랑 없음으로 느껴진다. 분명 행위가 내게 가져다준 유익이 있었기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강요하다보니 판단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사랑으로 권면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형제자매를 정죄하기 보다는 궁휼함으로 품는다고 해도 궁휼함이라는 감정 안에 이미 판단이 개입된 것이 아닌가?
또한 막연히 율법주의를 벗어나야한다고 하면 그동안 나를 가둬왔던 행위적 신앙생활을 청산해야 할 것 처럼 느껴지는데, 아마 행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 행위를 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행위에 담긴 의미와 목적을 곱씹어서 완성해가야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는 훗날 교회가 세운 그 어떠한 족쇄도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오로지 사랑의 어법으로 말하는 자유의 학교였다고 한다. 잠잠히 예수의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봐야겠다.
2. 나는 죽고 예수로 살기
나는 언제나 우아한 신앙생활을 꿈꿔왔다. 내 품위를 헤치지 않는 선에서 열심있는 신앙생활 말이다. 거추장스러운 허례허식과 미사여구를 제끼고 난 후 발견되는 내 마음은 좀 깨름칙하다. 울면서 기도하되 콧물은 흘리면 안되고, 자선단체에 기부금은 내지만 실제로 어려운 사람들과 삶을 부대끼며 함께하고 싶지는 않다. 부자를 욕하지만 부자가 되고 싶고, 겸손을 자처하지만 진짜로 무시당하면 참을 수 없다. 예배는 늦어도 화장을 포기할 수는 없고, 소외받는 이들과 친구되기 위해 그들에게 안부는 전하지만, 아주 친해져서 한 무리로 엮이고 싶지는 않다.
그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가 되고 싶은 건 사람들이 인정하고 부러워할 만한 신앙인이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품위있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나를 높이려는 행위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대한 욕구는 내가 평생 안고가야 할 뿌리깊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책에서 말하는 근원적인 해결방법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하긴, 아마 내가 죽지 못하고 살아있기 때문에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를 흉내낼 수는 있지만, 예수그리스도로 살지는 못하나보다. 내가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있기 때문에 나의 평판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는 것들, 나의 욕구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들은 할 수가 없는 것일테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야한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왔다. 예수로 살기 위한 여러번의 시도도 있었다. 그런데 그 시도들이 계속해서 실패한 이후 언제부턴가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신앙서적읽고 뽐뿌질 온 김에 다시 한 번 시도해봐야겠다. 그리스도인을 흉내내는 것을 넘어 참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화이팅...
'독서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리뷰] 매일 아침 써봤니? - 김민식 (0) | 2018.02.15 |
---|---|
[독서리뷰] 아몬드-손원평 (0) | 2018.02.05 |
[독서리뷰]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러네이 엥겔른 (0) | 2018.02.03 |
[독서리뷰] 닥치는대로 끌리는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이동진 (0) | 2018.01.12 |
[독서리뷰] 결혼을 말하다-팀켈러 (0) | 2017.11.18 |